루소 태어나다.
1712년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수리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지 9일 만에 고열로 숨을 거두고 루소가 열 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루소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는데 항상 책을 끼고 다니고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은 루소를 고용한 고용주들을 속터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법원 서기의 조수로 일을 배우다가 무능하다고 쫓겨나고 시계 제조 기술에 필요한 동판 조각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루소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일은 휴일에 제네바 성벽을 홀로 산책하는 것이었으며 산책을 오래 하다 보면 성문이 닫혀서 종종 숙소에 못 들어가는 경우 생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잔인한 매질과 질책을 하였으며 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산책 중에 성문에 닫혀 버리자 루소는 숙소로 가지 않고 진정환 삶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열여섯 살부터 루소는 떠도는 생활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루소는 방황을 시작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개종한 직후 신부는 그를 돌봐 줄 사람으로 프랑스 안시 지방에 있는 루이즈 드 바랑 남작 부인을 추천해 주었고 갈 곳 없던 루소를 바랑 부인은 친절하게 받아주었습니다.

루소 이름을 알리다.
15년 동안 바랑 부인은 루소의 후원자이자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며 그가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도록 최선을 다하였고 몇 년이 흐른 뒤 이들은 연인관계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루소는 세상의 어떤 직업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직장 생활에 필요한끈기와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랑 부인의 조언대로 루소는 이탈리아 토리노로 가서 예전에 배운 조각 기술을 써먹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이어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갔으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랑부인의 추천으로 프랑스 샹베리에 있는 지적 조사부의 조수로 취직했을 때도 몇개월 넘기지 못하고 어느 귀족의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하였습니다. 돌고 돌아 그는 바랑 부인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자기에게 딱 맞는 음악 일을 하게됩니다.
안시 대성당 합창 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루소는 그것이 생계 수단이 되었고 필체가 좋았던 까닭에 악보 베끼기와 음악가정교사로 괜찮은 수입을 얻었습니다. 다시 바랑 부인의 곁을 떠난 루소는 오래도록 방황은 계속되었으며 1742년 서른살의 루소는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음악적 재능을 펼쳐보기도 했습니다. 비록 음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루소는 살롱과 문화계를 열심히 기웃거리면서 많은 문인과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비판적 지식인이 된 디드로와 만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루소는 파리에서 음악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귀족 여인들을 통해서만 출세할 수 있었던 당시 분위기상 숱한 여성들을 가르치던 그는 권력자들의 눈에 띌 기회도 많았습니다. 1744년 한 귀족 부인이 루소를 베네치아 대사의 비서로 추천하였고 비서로 꽤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였고 열정적이었으나 관직 사회의 속성을 잘 몰랐던 탓에 1년 만에 그만두고 가방을 싸게 됩니다. 1745년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별 희망이 없었고 그즈음 그는 평생 반려자가 될 테레즈 르 바쇠르를 만나 그녀의 선하고 따뜻한 성품에 반하여 그들은 동거하게 됩니다. 1749년 서른일곱의 루소는 거침없는 비판으로 감옥에 갇힌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는 길에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 공고를 보고 답변을 적어 냅니다. 아카데미가 내건 논문 주제는 ' 예술과 학문의 발전이 도덕의 향상 기여하는가' 였고 이 주제의 일반적인 답변은 뻔하였지만 루소는 정반대의 답변을 내놓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연 속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되었으면 예술과 학문은 인간을 본래의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치와 무절제로 몰아넣었습니다. 예술과 학문을 하는 이들은 노동에서 나오는 물자로 한가하게 지내며 사색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했습니다. 예술과 학문은 사람들을 게으름과 무절제 속에서 점점 더 사치와 방탕으로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 이 참신한 논문의 답변으로 심사위원들을 경악시켰고 상은 루소에게 갔으며 이 사건으로 루소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음악적으로 성공해 목가극 오페라<마을의 점쟁이>가 귀족들 사이에 인기를 끌어 루이 15세 앞에서 공연되기도 했으나 루소는 유명해 질수록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루소 세상을 떠나다
1753년 마흔살의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문제작을 내놓게 되는데 이글은 사회에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글에서 루소는 자연 상태를 설명하는데 자연 상태란 문명사회가 등장하기 전의 인류 상태를 보여주는 일종의 가설이며 이것은 인간사회가 왜 지금처럼 부정의와 불평등으로 가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의 타락하기 전 인류의 모습을 먼저 가정해보는 것이라 말합니다. 인간은 거친 자연에 맞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성을 발휘하여 집단을 이루었고 그때부터 불평등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우월한 자들의 자신 이익을 지키기 위해 열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여러 가지 관습과 제도를 만들어내어 우월한 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큰 이득을 얻고 사회는 불평등이 커지고 인류를 부정과 불평등으로 타락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소의 이런 생각들을 귀족과 부유한사람들에게 불편하였고 결국 루소는 프랑스를 떠나 고향 제네바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습니다. 문명과 부를 거부하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고 소리 지르는 철학자를 기득권층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당시 프랑스에서 <에밀>로 루소는 탄압들 받았고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곳을 떠돌다 쉰다섯의 나이로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1778년 루소는 시골 농원으로 이사하여 지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쓰러진 후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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