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데이비드 흄 태어나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1711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시골 유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 당시 귀족들은 보통 열네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흄은 열 두살의 어린 나이네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의 가족들은 돈을 잘 벌 수 있는 법학을 공부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열 여섯살쯤 철학자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그는 부와 명예보다는 인간의 삶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스물 세 살의 흄은 생계를 위해 설탕 상회 서기로 취직하지만 오래 하지는 못합니다. 1년 뒤 유산으로 연간 40파운드를 받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속박 없는 외국으로 나가려고 계획을 하고 그가 선택한 곳은 데카르트의 나라 프랑스로 떠납니다.

흄의 인간 본성론
프랑스에서 흄은 <인간 본성론>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스물 여덟살의 풋내기 철학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문을 하기에 가장 안정적인 직업인 교수직을 얻는데 이 책은 흄에게 가장 큰 장애를 주었습니다. 더욱이 <인간 본성론>은 영혼의 존재까지 거부한 까닭에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며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영혼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평가 받았습니다.
흄이 4년을 걸쳐 쓴 인간본성론은 인간 정신의 지도를 작성한 글이며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 무엇을 알고 추구하는지를 밝히려 했습니다. 그는 인간 이성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권위 있는 이론에 기대하지 않고 가장 확실한 지식이나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밝히려 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원인과 결과로 관계되어있으나 문제는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경험들일 뿐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밝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여기서 밥을 먹는 것은 원인이고 배가 부른 것은 결과이지만 우리가 확실하게 얻는 경험은 밥을 먹었다는 사실과 배가 부르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서 배가 부르다라는 인과관계 자체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일은 해가 뜬다는 명백해 보이는 사실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매일매일 해가 떴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내일 해가 뜬다는 것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구체적 사실로부터 보편적 사실을 생각하게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생각만큼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랜 습관과 관습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경험을 원인과 결과로 묶어주기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확신은 있지만 절대적 인과관계는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지식은 경험으로 얻게 되지만 경험은 결코 인과 관계 자체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으므로 인과관계를 기초로 얻어진 우리의 지식과 학문 역시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정확한 지식을 준다는 믿음이 확실한 시기에 어떠한 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흄은 자신의 출세를 막는 최대 걸림돌이 됩니다. 인간 본성론을 쓴 흄은 그의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냅니다. 프랑스 원정대의 장군 비서로 미치광이 후작의 가정교사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지만 세상에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철학자로서의 작업도 계속하면서 인간 본성론을<인간 지성에 대하 논고> 와 <도덕 원리에 대한논고>라는 제목으로 두권의 책을 내게 됩니다.
그는 1751년 마흔살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 법학부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되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유명한<영국사> 책을 내면서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됩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흄은 점점 유명해지며 1748년도에 쓴 <인간 지성에 대한 논고>와 1751년에 쓴 <도덕원리에 대한 논고>도 같이 주목 받기시작합니다. 그는 도덕은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성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인지 알려줄 뿐 그것이 정의이고 악행인지를 알려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경험으로 받아들여 공감하고 감정을 통해 도덕적이고 인간적인지를 판단하고 나아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안정된 법질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익을 주지 않는 법률에 복종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지라도 전체에 이익을 준다면 이를 받아 들일 줄 아는 공감 능력이 있으며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타국에서 더 사랑받은 철학자 흄
영국사가 크게 성공한 흄은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17863년 쉰 두살의 나이로 프랑스 외교관으로 파견되는데 이 시기가 그의 사회적 성공의 절정기였습니다. 흄의 세련된 말솜씨와 뛰어난 유머로 프랑스 사교계를 휘어잡았으며 그는 조국인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는 무신론자, 회의론자라며 외면당하고 파리에서는 <영국의 볼테르>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프랑스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던 흄은 1769년 쉰여덟살에 고향 에든버러로 돌아가 지내면서 높아진 위신을 마음껏 즐겼으며 밝고 낙천적인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도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1776년 흄의 나이 예순다섯의 나이로 눈 감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회의론자이자 무신론자인 자가 죽음에 이르러 신에게 회개할지가 무척 궁금하였는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회의적인 태도를 포기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흄 그는 "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