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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철학자 러셀 태어나다

1872년 영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러셀은 태어났습니다. 귀족 집안이긴 하지만 반골의 색채가 강했습니다. 멀게는 17세기경 트튜어트 왕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윌리엄 러셀 경이 그의 선조이고 가까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민주적 선거법 개정을 추진한 존 러셀 경이 그의 할아버지입니다. 집안 전통에 따라 러셀의 아버지도 무난한 정치인은 아니었는데 보수적인 영국 정치계의 여성의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거나 진보적인 언행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집안을 보면 대개 그 사람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듯 러셀의 가문 내력만 보아도 그의 진보적이고 극단적인 정치 사회적 언행은 그냥 만들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러셀이 두 살 때 부모가 모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는 형과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살지만 2년 뒤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 당시 귀족 자제들이 그러하듯 러셀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저택과 자연 풍경 속에서 지내며 필요한 공부는 가정교사에게 배웠습니다. 주로 스위스인이나 독일인 가정교사를 채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엄격한 할머니와 함께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느라 그는 우울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런 우울한 일상에 돌파구를 찾아준 건 그의 형 프랭크였습니다. 무의미한 삶에 계속 고뇌하며 힘들게 지내고 있을 때 프랭크는 러셀이 열한 살 무렵 기하학을 가르쳐 주었고 그는 수학의 세계에 정신 없이빠져 듭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기도 싫은 복잡한 수식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수학을 더 알고 싶어 삶의 무거움은 견뎌내기도 합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러셀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다

1890년 열여덟 소년 러셀은 영국 최고의 명문인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이때 러셀의 심사위원으로 유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 교수였으며 그의 뛰어남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이렇게 만난 스승과 제자는 20년 뒤 <수학원리>라는 책을 공동 저술하여 철학과 수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수학을 공부하게 된 그는 한동안 행복함을 느끼며 관심 분야를 넓힙니다. 처음에 러셀은 수학에 빠져지내지만 졸업할 무렵 철학, 정치 문제 등 관심을 가지게 되고 대학에서의 뛰어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격도 사교적이고 유쾌하게 변해갑니다. 1893년 스물 두살의 청년 러셀은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평생 지속되는 여성 편력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미국 여성과 결혼을 강행하고 전통적인 영국 귀족인 러셀 가족들은 미국인 여자와 결혼을 반대합니다.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러셀을 파리 주재 명예 외교관으로 임명되도록 하지만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막지 못하였고 결혼 후 그들은 미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 여행을 계기로 러셀은 더 큰 세계를 몸으로 느끼며 트리니티 대학에서 받은 연구비로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연구 활동을 시작합니다. 1896년 러셀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최초의 저작을 내놓으며 그 뒤 학자적 삶을 넘어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현실에 뛰어 들었습니다. 1907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의회에 진출하지만 두 번 다 낙선을합니다. 떨어진 이유를 보면 그의 솔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러셀을 왕성한 사회 활동 중에도 수학적 철학적 연구를 꾸준히 하며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철학 회의에서 기호논리학자 주세페 페아노를 만나게 되고 그 계기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음에 러셀은 큰 영감을 얻게 됩니다. 몇 달 뒤 러셀은 <수학의 원리들>이라는 저서를 내놓게 되며 주된 내용은 수학과 논리학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수학은 순수한 논리적 전제들에서 나오며 단지 논리적인 용어들로 정의 할 수 있는 개념들만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대한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의 교수였던 화이트헤드의 도움을 받아 매년 8개월 동안 14시간씩 작업한 끝에 1910년 마침내 화이트헤드와 공동 저자 형식으로 수학적 지식에 관한 저서를 내놓으며 이 책이 바로 유명한 <수학 원리> 입니다. 이 책으로 수리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졌고 기호논리학이 학문의 새로운 방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러셀의 수학원리

러셀은 <수학의 윈리>의 명성에 힘입어 트리트니 칼리지의 논리학·수학 담당 교수가 되었으나 교수는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이 전쟁을 미친 전쟁으로 규정하고 기관총, 전차 등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한 대량파괴 무기로 인한 무서운 결과를 예견하고 전쟁을 막으려 했습니다. 적극적 전쟁 반대운동을 했지만 그의 충고는 무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서 쫓겨나고 6개월간 감옥에 감금되었으며, '독일 잠수함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해변의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순수철학과 수학을 계속 연구하고 세계와 언어는 각각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두 세계는 서로 대응관계에 놓여있다는 내용의 '논리적 원자론'을 발전시켰으며 명제를 분석하여 철학의 전통적 존재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도 개발했습니다. '논리적 원자론'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명제는 세계와 1대1로 대응하기에 의미를 갖는다는 이론이고, '기술 이론'이란 때때로 주장의 주어가 우리로써는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대상인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술이론이나 논리적 원자론만큼 러셀은 사회활동을 왕성히 하며 이름을 날렸고 그 와중에 많은 염문설로 가정불화가 생겨 첫번째 부인과 이혼 하고 두번째 부인과 결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첫 아들을 얻게되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실용주의 철학자 듀이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가 그러하듯 러셀 또한 교육을 통해 사회개혁을 꿈꾸었으며, 형의 시골집을 빌려 실험학교를 열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두번째 부인과 함께 학교 운영을 하게 됩니다. 규율 속에 자율을 내세운 학교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게됩니다. 형이 죽으면서 러셀 집안의 백작 칭호를 상속받았고 동시에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가 운영하던 학교의 재정파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두번째 부인과 마찰을 빚게 되고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됩니다. 이듬해 그는 세 번째 결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 뉴욕 시립대학 등에서 강의를 합니다. 다시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러셀을 나치의 반인륜적인 정치사상을 비판하면서 연합군을 강력히 지지하고 연합군은 러셀을 유용한 정치선전 수단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뒤에 시작된 냉전체제에서도 러셀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나아가 핵무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다시 정부의 탄압을 받게됩니다. 1970년 98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 전까지 잔혹한 학살극이 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옳지않은 일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고 비판하는 철학자의 역할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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