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정신 철학자 헤겔 태어나다.
헤겔은 부르템베르크(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헤겔의 삶은 매우 평범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고위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별다른 고생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고 다섯 살 되던 해 라틴어 학교에 일곱살 때 김나지움에 입학했습니다. 김나지움 시절 여러 분야에서 상을 타는 모범생이었으며 그 시절에 대철학자의 자질이 보였습니다. 하루에 일어났던 일과 의미, 자신의 느낌 등을 일기에 꼼꼼히 정리했으며 읽은 책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볼 수 있도록 색인표까지 만들었습니다. 수 많은 자료를 잘 다루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연구 방법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장점이 많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인데 그는 영리하고 지적이지만 운동신경이 둔해서 무술, 체조를 아주 못하였으며 발표 실력이 부족하여 발표시 행동이나 음성 때문에 자주 지적을 받았으며 교수가 되어서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헤겔의 강의를 들은 어떤 학생은 '조금 언짢은 듯 머리를 낮게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계속 말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말은 끊임없는 헛기침으로 계속 끊겼고 그래서 문장들은 따로따로 떨어지고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생애도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 있었는데 태어난 해에 질풍노도 운동이 일어나고 학생 시절에는 미국 독립 선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 났으며 장년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말년에는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시작된 자유 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의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혼란의 시기에 때때로 힘든 일을 겪긴 하지만 아주 극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헤겔은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철학자 셀링과 시인 흴덜런을 만나게 되며 훗날 거물급 인사가 된 세 명은 1년 정도 한방에서 같이 생활합니다. 헤겔이 열아홉살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 이들 세 명을 함께 묶었던 끈으로 혁명이 내세웠던 평등, 자유, 박애의 이념은 세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혁명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았으며 열정을 갖고 신중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보통의 젊은이들은 가벼움으로 혁명의 열정을 잊어버렸지만 헤겔은 집요함으로 열정을 오래 간직했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 시절 헤겔은 자신의 전공 신학보다는 조국인 독일의 낙후 된 현실에 관심이 더 있었는데 독일은 혁명의 새 시대가 왔는데도 박애, 평등,자유 등 같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것에 이르는지에 관심을 가졌으며 고민 끝에 쓴 책<민족 종교와 기독교> 입니다. 헤겔은 이책에서 민족정신을 아들에게 비유하며 민족정신의 아버지는 시대,역사이며 어머니는 정치이며 유모 즉 아들의 교육자는 종교이고 예술은 유모의 보조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유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철학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 했습니다. 1793년 헤겔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되지 않고 철학에 더 관심 있었어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대학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교수로 잡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는 7년을 프랑크푸르트와 스위스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자로서의 혹독한 겨울을 보냅니다. 그러다 마침내 1793년 셸링의 초청으로 예나 대학의 강사로 초빙됩니다. 그때 예나 대학은 셀링, 피히테, 실러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모여 있는 철학의 중심 였으며 헤겔은 이곳에서 13년을 지냅니다. 그의 대표작 <정신 현상학>은 이 시기에 쓰였으며 책에서 헤겔은 과학, 신학,논리학을 꿰뚫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상했습니다. 정신현상학이 완성될 무렵 나폴레옹의 군대가 예나를 침공하고 있었으며 헤겔은 나폴래옹 군이 예나 광장에 피운 모닥불을 바라보며 이책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하여 말을 탄 절대정신을 보았다라고 적었습니다.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한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절대정신 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그 절대정신은 헤겔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헤겔의 집을 약탈하고 대학을 폐쇄하여 그의 직장을 잃게 하고 실업자가 된 헤겔은 또다시 생계수단을 찾아 여러 곳을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베를린대학으로 입성
1806년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8년을 보냅니다. 그곳에서 마흔한 살의 김나지움 교장 헤겔을 스무 살 처녀 마리와 결혼을 하였고 이 결혼으로 헤겔은 안정을 찾아갑니다. 이듬해, 두번째 대표작인 <논리학>을 출간하였고 1816년 이 책의 명성 때문인지 꿈에 그리던 정교수가 되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초빙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세 번째 대표작 <엔치클로페디>도 출간됩니다. 엔치클로페디는 영어로 백과사전이라는 뜻으로 헤겔은 절대정신과 변증법의 논리로 그 당시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학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철학체계를 완결 지으며 이 때문에 헤겔의 철학은 거대한 함선이 되었습니다. 헤겔은 더욱 유명해졌고 드디어 독일의 사상적 중심지로 떠오르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대표작 <법철학>을 출간합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의 헤겔은 혁명 이후 계속된 혼란을 바라보며 공허한 자유 이념의 한계를 깨닫고 시대를 구원할 대안을 국가에서 찾았고 시민 사회의 혼란은 정신, 이념의 부재라 생각 하였고 시민사회에 부족한 이념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국가가 인륜이 되는 모델을 프로이센에서 찾았으며 인륜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입헌군주제를 제안했습니다. 그 뒤 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그 시대 최고의 학자로 최고의 대우 받았습니다. 헤겔을 따르는 헤겔 학파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졌으며 철학자로서 영예를 누리던 그는 예순 살 때 콜레라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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