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쇼펜하우어태어나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유럽 북쪽의 단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부모 두 분 다 네덜란드계였으며 아버지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나중에 알려질 만큼 유명한 작가로 예술가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무 살 정도의 나이 차와 상인과 예술가 기질의 차이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 많이 불러는 데에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의 태도가 원만하지 못한 가족과 어머니와의 잦은 불화설에서 시작되었으리라고 많은 추측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들에 대해 처음부터 애정을 주지 않았으며 훗날 너는 용서할 수 없는 귀찮은 녀석이며 함께 살기 몹시 힘들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뒤를 이를 세계시민적인 사업가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어린 쇼펜하우어를 세계를 배우게 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곳으로 보내어 외국어를 익히고 고급문화를 직접 보고 느끼게 했으며 이 기회로 쇼펜하우어는 각국의 언어와 귀족적 품성을 익혔습니다.
1799년 열한 살인 쇼펜하우어는 장차 상인이 될 학생들을 교육하는 랑케 사립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상업보다는 인문학에 더 흥미를 느껴 김나지움을 가고 싶어했으며 아들의 결심이 너무나 확고하여 장차 상인이 된다는 조건하에 김나지움 진학과 견문을 넓히기 위한 유럽 여행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으며 쇼펜하우어는 2년간 유럽 여행을 선택합니다. 1805년 아버지가 상점 창고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쇼펜하우어는 충격을 받고 이 일로 어머니와의 사이도 틀어져 버립니다. 어머니와의 잘못된 관계때문인지 그는 여자를 경멸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부녀 사이는 결별을 선언하고 어머니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함부르크를 떠났고 쇼펜하우어는 2년 동안 그곳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 김나지움을 입학하게 됩니다.

플라톤과 칸트를 만나다
1908년 스물한 살의 청년 쇼펜하우어는 대학생이 됩니다. 괴팅겐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칸트 연구가인 슐처의 강의에 감명을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고 슐처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진리를 알려면 우리가 느끼고 보는 세계를 넘어 세상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되며 칸트에게서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외부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인간의 주체 의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쇼펜하우어는 2년 뒤 괴팅겐에 오래 머물지 않고 피히테와 슐라이어하머가 명성을 날리던 사상의 중심지 베를린 대학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피히테의 열정적인 애국 연설을 듣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국 해방전쟁에 참여할까 생각하였지만 결국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1813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밝게 보지 않았으며 이 세계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것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도 객관화된 의지일뿐 자연과 인간을 움직이는 의지는 겉으로는 차이점을 알 수 없지만 원리적으로는 모두 같다 하였습니다. 의지란 욕망과 충동이며 돌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고, 동물들이 살기 위해 싸우고, 식물이 자라나고 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의지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므로 채우고 채워도 계속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고통이 따르고 그 삶은 맹목적인 의지이고 세계는 근본적으로 악하며 인생은 결국 고통일 뿐
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심할 수 있으며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욕구와 충동을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생활을 해야 하며 그때에만 고요한 영혼의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산업의 발달로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며 인간은 점점 행복해지리라 믿었던 과학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반성이였으나 무명의 철학자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는 서른두 살에 베를린 대학 강사로 채용된 뒤 시대정신이라 일컬어지던 헤겔과 정면 대결을 시도 합니다. 하지만 헤겔의 강의실은 북적거리는 반면 자신의 강의실을 텅 비어 있었고 나중에는 한명의 학생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강의를 그만둡니다. 이 실패로 자기 사상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각하게 헤겔을 공격하며 고민에 빠지지만 정작 헤겔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우울해져서 망상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1831년 함부르크에 콜레라가 퍼져 헤겔이 죽게되고 헤겔의 죽음은 쇼펜하우어의 기회가 됩니다.
이때부터 쇼펜하우어는 이성 중심 사상의 헤겔이 사라지니 소외되어 있던 그의 사상들이 주목받게 되며 사상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지며 추종하는 광신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성공에 매우 만족한 그는 자신의 보도 기사를 자세히 읽으며 즐거워 했다고합니다.
1860년 쇼펜하우어는 일흔 두살 나이로 삶을 마치고 눈을 감습니다. 그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 안전과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을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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