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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하버마스 태어나다

18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하버마스는 태어났습니다. 그 뒤 굼버스마흐라는 작은 소도시로 이사를 와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그늘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으며 그의 회상대로라면 아주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청소년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세계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무렵이였고 당시 또래들처럼 히틀러 소년단에 들어갔습니다. 하버마스 나이 15세 때 일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 재판에 대한 기록영화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에 일어났던 엄청난 죄악을 알지 못하였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으며 그 계기로 그는 정치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1949년 스무살에 괴팅겐 대학에 입학한 하버마스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을 거쳐 1954년 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대학생 시절 하버마스는 정치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연합군이 해체한 군대를 다시 모아야 한다는 극우집단에 반감은 있었지만 마음만 있을 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독일대학은 보수적으로 유명합니다. 시대변화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전문영역을 열심히 그리고 깊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혼란 후 전후 독일 상황에서도 하버마스가 받은 철학 교육은 지극히 전통적이었으며 이 부분에 대해 하버마스는 철학적 신념과 정치적 문제의식은 별개였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버마스 계몽의 변증법에서 희망을 보다

학위를 받은 하버마스는 신문기자로 일하였으며 그시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같이 쓴<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면서 그는 희망을 보게 됩니다. 사회적 문제 의식에 불타던 그에게 철학적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두 철학자의 노력이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비판이론> 또는 < 프랑크프르트 학파 >라고 부르는 학풍의 1세대들이며 이들은 계몽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인류를 야만에서 해방하고 발전시킨 듯 하나 사실은 재앙으로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엄청난 재앙은 결국 과학 문명이 낳은 결과입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고상한 말을 내세우지만 이성으로 무장한 인류가 저지르는 폭력은 어떤 야만인의 행위보다 가혹하고 잔인했습니다. 자연은 이제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는 대상 되어버렸습니다. 나아가 과학이라는 잣대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중요해지면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얼마나 도덕적이고 인간적인지보다 무슨능력이 얼마나 있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자신도 상대를 이용과 억압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비판이론은 산업자본주의의 사회와 여러 문제들의 원인을 인간의 이성, 곧 합리성의 근본적인 결함에거 찾는다고 했습니다. 청년 시절 하버마스는 이 책 속에서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철학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 평가했습니다.

2세대 거장 하버마스

1954년 그는 비판이론의 본고장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연구조교로 취직하며 이것은 하버마스가 비판이론의 제2세대거장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수년 동안 교수자격 논문을 준비하여 1961년 공로의 구조변화라는 제목으로 아도르노에게 제출하였지만 이 뛰어난 글은 심사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비판이론가들은 이성을 매우 비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지만 하버마스는 정반대로 합리성에서 인류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가 쓴 이론과 실천, 인식과 관심에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처럼 과학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먼저 말합니다. 자연과학은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며 물 문명은 과학적 판단을 절대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수치로 판단할 수 없고 어디에 유용한지를 알 수 없는 것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며 그래서 종교나 도덕적 규범, 인간관계 등은 과학적 잣대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명목아래 사물을 연구하듯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관찰하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물질적인 문제만 해결될 뿐서로가 서로를 이용 대상으로 바라보고 억압하는 상황은 여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하버마스는 단순히 빈곤만 사라진 상황을 인간의 진정한 해방으로 보지 않았고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이 가능해야만 비로서 해방된 사회라고 했습니다. 1960년 절대 가난이 사라진 유럽에서 비판이론이 사회적 대안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해방된 사회는 이성을 통한 논쟁과 가르침, 계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비판이론가들이 퍼붓는 인간의 합리성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르노에게 버림받은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교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964년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 사회학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비판이론의 공식적 후계자로 인정받으며여 1971년 까지 교수로서 활동합니다. 1971년 그는 프랑크푸르트 교수직을 사퇴하고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 있는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자리을 옮기게 됩니다. 하버마스는 지금까지 어떠한 폭력에 대해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런일들로 극렬 학생 운동권들과 적이 되었습니다.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하버마스는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연구소에 파묻혀 10여년간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면서 의사소통 행위이론이 탄생합니다.

하버마스는 1982년 프랑크푸르트대학에 복직하였다가 1996년 은퇴했으며 아직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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