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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자 벤담

공리주의 벤담을 이야기하다

어린 벤담

벤담은 1748년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고 몸이 약한 아이였습니다. 친구들과 놀기 보다는할머니나 어머니와 놀기를 더 좋아 하였으며 겁이 많아 귀신 얘기를 들은날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어린 벤담은 식물 채집을 흥미로워 했으며 꽃을 아주 좋아 했습니다. 동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낚시와 사냥을 아주 싫어 했습니다.벤담의 아버지는 조기교육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너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무릎에 앉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익히도록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열성적인 교육으로 벤담은 일곱살때부터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그리스와 라틴어로 시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똑똑한 벤담은 그의 나이 12살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가게됩니다. 하지만 너무 조숙해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대학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천재소년 벤담은 무적응속에서도 3년 만에 대학 졸업을 하게 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합니다 .

제레미 벤담  1747-1832

법률가 벤담

벤담은 변호사 일보다 법 자체에 관심이 더 많아서 가혹하고 비과학적이였어 사소한 잘못으로 사형당하는 경우가 많아 그는 법 개정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1776년 그는 이름을 감추고< 정부론 단편>이라는 책을 내는데 영국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법률학자 블랙스톤의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 이였습니다. 블랙스톤은 영국의 법학자 이며 산업혁명 이전까지 영국 법 전반을 체계화하고 해석한<영법석의>를 써서 독립전쟁 전후의 미국법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이론을 비판하며법률은 단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책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를 효과적으로 비판했단는 점에서 몇몇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합니다. 수재인 벤담은 열다섯살에 대학을 졸업하지만 이름 없는 학자였으나 셸번백작을 통해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일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데 백작아들의 가정교사였던 뒤몽을 만난 것입니다. 뒤몽은 비밀선거 ,보통선거 등을 주장하는 벤담의 사상이 상당히 혁명적인것을 알아보고 나중에 벤담의 저작을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프랑스에 전하려 하였으며 덕분에 벤담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ㅡ 공리주의

1785년 동생의 초청으로 러시아로 가서 두 해 동안 독서로 세월을 보내며 경제 문제를 면밀히 관찰하며 정리하여 <고리대금을 위한 변론>이란 책을 영국 의회에 보냅니다. 책 내용은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 수입에 대한 것이며 당시는 이자수입이 죄악시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벤담은 이자를 노리는 금융거래는 오히려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였습니다.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이자율을 제한하려던 의회는 법안을 부결시키게 되고 이때부터 벤담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벤담은 1780년 자신의 야심작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는 벤담의 공리주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담아냅니다. 벤담 철학은 쾌락주의를 기초로 하는데 쾌락주의의 따르면 사람들의 행동은 쾌락과 고통이 지배한다이며 쾌락은 곧 선이며 고통은 악이고 불행이며 올바른 행위란 자신이 얻을수 있는 쾌락의 양을 늘리는 것이고 잘못된 행위는 쾌락의 양을 줄이는 것입니다.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쾌락을 계산해 밝힐 수 있다합니다. 그 기준은 강도,확실성 ,근접성 , 생산성,지속성,수순성 6가지인데 여기에다 일곱번째 기준으로 범위를 추가합니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쾌락뿐 아니라 다른사람을 도와 주면서 얻어지는 쾌락이 있으며 더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으며 즉 윤리적 행위란 결국 그 집단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벤담은 이것을 공리성의 원리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라 부르며 모든 법률에는 개인의 쾌락과 집단전체의 쾌락이 조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802년 벤담의 원고를 뒤몽이 정리하여프랑스어로 입법론을 출간되는데 여러가지 법 제도의 개혁안을 담은 이책에는 시대요구를 아주 적절하게 반영을 한것입니다. 이책으로 그는 유럽내에 이름을 알리게되며 자신의 명성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벤담은 사색보다는 행동하는 지성이였으며 책도 활동도 남는 시간을 이용했며 그의 책들은 대부분 큰 틀만 벤담이 직접쓰고 나머지 부분은 제자나 동료들이 정리하였습니다.그에게 아주 뛰어난 밀이라는 제자가 필요했던 이유이기도하며 밴담은 말년에 밀의 영향으로 민주주의자가 되어가기도 합니다. 처음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 실현되려면 민주주의보다 군주제가 효과적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군주도 다수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쾌락에만 집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민중에게 권력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 방법으로는 보통선거 비밀선거의 도입을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벤담주의는 곧 파격 급진파파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했습니다.그는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벤담주의적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으며 당시 그영향은 영국의 선거법 ,경제 제한 철폐등에 끼치게 됩니다.

 

위대한 개혁 철학자

1832년 벤담은 본인이 노력하였던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흡족한 듯 웃음을 머금고 자는 듯 눈을 감았으며 그의 나이 여든네살 되던 해였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런던 유니버시티 대학의 해부 실습용으로 기부 되었으며 아직도 유해는 런던 유니버시티 대학에 보관중입니다.살아생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철학자는 매우 드뭅니다. 벤담의 사상은 그가 살아 있을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점에서 벤담은 매우 성공한 철학자 였습니다. 우리는 공리주의 사상을 상식처럼 느끼는데 그이유는  벤담의제자 밀이 공리주의를 더욱 명확하고 정교하게 다듬었고 그 사상이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벤담은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철학자는 아니였지만 구름위에에 둥둥 떠 잇는 여러 사상적 철학을 인간의 문제속으로 끌고와서 구체적인 문제속에서 철학을 실현시킨 철학자 입니다. 밀은 스승 벤담을'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였지만 철학에서 위대한 개혁가이기는 했다'하고 평했습니다. 벤담은 헤겔과 칸트처럼 철학 역사에 위상이 크지는 않지만 우리의 생활에는 아주 큰 영향을 준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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