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어린 밀
존 스튜어트 밀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1806년 런던의 펜톤빌에서 태어납니다.아버지 제임스 밀의 명성은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철학사에 나란히 이름을 남긴 유일한 가문입니다. 밀의 어머니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독선적 남편의 기세에 눌려 아들의 교육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아버지인 제임스 밀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남쪽으로 이주합니다.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1818년도에 11년을 거쳐 완성한 그의 야심작 <영구령 인도사>를 출판합니다. 그는 이책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동인도 회사의 심의관으로 취직하게 되며 경제적 부와 명성을 얻게 된 제임스 밀은 평소 하고고 싶던 정치와 철학 저술에 몰두하면서 아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이 책은 평생토록 아들 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자신처럼 아들 밀도 인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제임스 밀은 벤담과 친하게 지냈지만 대학교육과 종교에 대해서는 믿음을 보이지 않아서 본인이 직접 아들 밀의 교육을 맡으면서 특별한 조기교육을 통해 자식의 앞날을 결정지으려 했으며 밀은 아버지와 벤담에 의해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두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밀은 3세부터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여덟 살 전에 헤로도투스의 역사와 이솝우화,플라톤의 대화편 등을 그리스어로 읽었으며 조금 더 커서는 라틴어와 기하학, 대수학을 배웠으며 11세 때에는아버지의 원고 수정을 도왔다고 합니다. 14살 때 벤담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보내며 몽펠리에 대학에서 화학, 논리학 , 고등수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밀의 고민
1820년대 초 콩트와 교류하면서 영국의 실증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게 됩니다. 밀은 평생 고민하고 짊어져야할 2개의 짐을 떠안게 되는데 하나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식민지 사회를 통해서 본 사회의 후진성과 선진성에 대한 선입견이었습니다. 밀은 조기 천재 교육으로 인해서 친구를 사귈 시간을 갖지 못하였고 이러한 가정교육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밀은 회고합니다. 밀은 1823년 대학에서의 연구직 제안을 거절하고 아버지의 제안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에 들어가 연구와 일을 병행합니다. 스무살이 이르러 그는 정신적 문제가 발생되면서 벤담주의에 대한 반감들과 주지주의적 이성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갈등과 방황을 하게 됩니다.

밀의 결혼생활과 아내의 죽음
심각한 신경 쇠약에 걸린 밀은 워즈워스의 시와 마르몽텔의 작품을 통해서위안을 얻으며 이 시기에 해리엇 테일러 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며 냉철하면서도 속 깊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 여인을 통해서 서서히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해리엇 테일러는 남편 존 테일러와 함께 자유적인 유니테리언주의 활동을 하였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일 정도로 꽤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지녔던여인입니다. 밀은 그녀와의 지적인 교류를 약 20년 동안 유지하는데, 1851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가 된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밀은 결혼 생활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지만 동지이자 친구였던 해리엇 테일러와 더불어 작품활동을 하며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결혼 이후에 밀은 아내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자유론>과 <여성의예속>을 발표하는데 <자유론>에는 밀 스스로 자신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남는 책이라도 특별한 의미를 주었고 <여성의 예속>은 훗날 페미니즘의 고전이 명성을 얻게 되는 밀의 대표작이 됩니다. 동인도 회사가 문을 닫게 된 후 는 저술에 전념하며 <대의 정치론> <공리주의>< 영국과 아일랜드>를 발표하며 1865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정계에도 진출하여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을 지냅니다. 밀은 의정활동안 보통 선거권과 비례대표제의 도입 및 협동농장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으며 특히 1866년보수적인 영국 의회에서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역사적인 발언을 합니다. 결혼 후 저술 활동과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7년 후 쯤 프랑스 여행을 함께 떠난 아내인 해리엇 테일러는 폐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 밀은 비탄에 빠지게 됩니다. 밀은 아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빗대어 지성과 의지력 면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당할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밀은 죽기전까지 부인의 무덤옆에서 반년을 살았으며 해이엣테일렁의 딸인 헬렌의 보살핌속에서 1873년 나는 애 일을 다 끝마쳤다라고 말을 남기고 아내의 묘 옆에 묻혔습니다.
밀의 공리주의
밀의 사상을 말할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언는 공리주의입니다. 밀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벤담과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를 받아 들이게 됩니다. 벤담의공리란 말의 의미를 경제학 용어인 효용의 의미로 부터 가져오며 효용의 원칙이란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감소시키느냐에 증진시키느냐에 따라 행위의 승인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여기서 행복이란 선, 이익, 기쁨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는데 공통점은 모두 경험적 호용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벤담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기쁨을 지배 받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은 선과 악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기준이며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제일의 원칙은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며 여기서 행복이란 추상적생활의 만족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 경제적필요의 충족을 말하는것이며 공리주의가 도덕적으로 선한이유는 행복을 추구한다는 동기가 아니고 그 결과가 만족을 가져다 주기때문에 벤담의 공리주의는 철저한 결과주의라고 말합니다.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하고 중요한 수정을 하는데 벤담의 공리주의가 최대다수 라는 말에서 와 같이 행복의 양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밀은 행복의 질적 측면을 중요시 하며 동물적 수준의 저급한 만족과 고상한 인간적 수준의 행복을 같은것으로 취급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 배부룬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 라는 비유는 여기서 나옵니다. 기쁨의 질적 차이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기 어렵지만 배부름보다 좋은 음악감상이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밀의 생각인 것입니다. 인간은 지적수준이 높아 질수록 보다 고양된 행복을 추구하고 지성이 교육과 수양을 통해 점차 나아지게 되면 자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이웃이나 국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간주할수 있는 단계에 다다른다는 것입니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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