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루트비흐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괴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괴짜였습니다. 이렇게 괴팍하고 독특한 성향의 철학자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의 아버지 카를비트겐슈타인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카를은 부모의 간섭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 닦는 일을 하면서 수학과 바이올린,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생활하다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뒤 기업가로 성공합니다. 비트겐슈타인 가는 유럽의 음악가와 예술가들의 지원을 해주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그의 저택에는 음악가 말러, 브람스, 카살스,화가인 클림트등 유명 예술가인 들이 많이 출입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여덟 자녀중 막내로 태어납니다. 그의 집안사람들이 그러하듯 비트겐슈타인도 천재성과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면서 교향곡 전 악장을 통째로 외우면서 클라리넷으로 수준급이상으로 연주할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습니다.
비트겐슈타인가는 많은 부를 소유한 재력가였지만 자식들의 인생은 불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형이 네명 있는데 그중 세 명은 젊었을 때 생을 마감합니다 . 큰형 한스는 가업을 이어 받으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뿌리치고 미국을 건너 간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셋째 형인 루돌프는 베를린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둘째형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한 뒤 권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은 끊습니다. 다섯 형제중 자살하지 않은 사람은 4남인 파울과 비트겐슈타인 뿐입니다. 파울은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지만 ' 천재 외팔이 피아니스트 ' 로 유명해지며 그를 위해 왼팔용 곡을 작곡해주었을 정도 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빈의 명문가 자녀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평범한사람들이 진학하는 기술학교로 들어가서 손으로 만드는 일과 기술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을 보입니다.
그는 어린시절 최신형 재봉틀을 스스로 조립 할 정도로 공학쪽에 남다른 자질을 보였고 1906년 란츠 실업학교를 졸업한뒤 베를린 공대에 진학했고 1908년 항공공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영국 맨체스터로 유학을 갑니다. 1910년 제트 엔진에 대한 특허를 내기도 합니다. 항공 공학에 수학이 필수이며 그는 자연스럽게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수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1912년 스물세살의 그는 자신에게 철학적 자질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대 예나 대학에 있는 프레게를 직접 찾아가지만 그는 러셀에게 배우라고 충고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배우기 위해 러셀이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합니다.
러셀은 이 젊은이의 비범함을 첫눈에 알아보고 그를 완벽한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 했습니다. 러셀은 친구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것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정신적 경험이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천재성을 알아 봅니다.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을 하다
비트게슈타인이 철학을 공부 한 것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세 학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의 관계는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사이가 아니였으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스승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을정도로 러셀은 논리학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되레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서 영감을 얻곤 합니다. 그는 철학적 자질만큼이나 성격이 괴팍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피하였고 제자들에게 관대했던 러셀도 비트겐슈타인 때문에 마음이 상하곤 했습니다. 1913년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럽의 변두리 노르웨이에서 지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가장 먼저 위험한 임무를맡았고 침착하고 용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자로서의 초연함을 유지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보낸 5년동안 한권의 책을 쓰는데 그책이 유명한 논리철학 논고 입니다.
이책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주된 관심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 언어 ' 였던 것입니다.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쓰이는 말들이 실제 상황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언어는 명제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는 가능한 상황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황들은 명제들과 각각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고 똑같은 논리 구조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언어를 이런식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 왔던 신,자아,도덕의근거 등에 대한 논의는 뜻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의들은 말이안되는 말을 끊임 없이 내뱉는 것에 불과하고 진정한 언어란 과학처럼 실세 세계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벌교사의 낙인
논리철학 논고를 쓴뒤 그는 철학계로 돌아가지 않고 자원하여 가장 낙후되고 외진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는 매우 열정적이고 유능한 시골 선생이였으며 마을의 증기기관을 맨손으로 고치고 철자법을 가르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을 내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미움과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리 높아 체벌을 서슴치 않았고 학생들 대부분 출세하고는 별 상관없이 농사를 지어가며 살아갈 처지라 공부를 못하면 왜 매를 맞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 초등학교 선생으로 보낸 6년이 비트겐슈타인게는 가장 불행한 세월이였습니다.
1626년체벌이 문제가 되어 결국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수도원 정원사보조 노릇을 하다가 절친한 누이 마르가레터의
부탁으로 집을 설계해주는데 극도로 절제되고 단순하여 논리학을 구현한듯힌 느낌을 주어 대저택은 지금도 현대 건축사의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연구생활을 전념하다 1930년대 중반에 러시아로 이주하지만 그가 원했던 대학교수가 아니라 육체를 사용하는 막노동이였고 그곳은 일손이 남아서 러시아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는 영국 국적을 취득하여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되며 철학교수한 직업을 수치로 여기는 철학교수가 탄생한것입니다. 1947년 58세인 그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아일랜드의 더블린 근교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으로 빈과 노르웨이 미국등을 전전하다 1951년 케임브리지에서 암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62세이다.